그 곳의 순례의 계절, 여름

안데레사 기자 | 기사입력 2019/08/04 [19:05]

그 곳의 순례의 계절, 여름

안데레사 기자 | 입력 : 2019/08/04 [19:05]

  © 뉴스와 사람


[뉴스와 사람= 안데레사 기자] 어젯밤에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 앞에서 잤습니다. 내 여름 단골 잠자리입니다. 한여름 내 방은 너무 덥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내 방이 더워 거기 누워 잔 게 아닙니다. 거실이 생각보다 서늘해 거기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에어컨 없이 춥게 자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더 이상 뜨겁지 않았거든요. 선들선들한 바람이 살갗을 아주 미세하게 식히고 있었거든요.

 

예상대로, 자정 무렵에는 체온이 낮아져 나는 이불 덮고 잤습니다. 물론 어젯밤에 이불 덮고 잔 사람은 내가 유일한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어서요. 가끔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웬만한 것은 뜨거운 게 아니라 따뜻한 거라고 하거든요. 그래도 8월 초에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있는 실루엣은 여름의 실루엣이라 하기 어려운데.

 

8월 말까지 지난하게 이어질 줄 알았던 무더위가 어제 오후부터 한풀 꺾인 모양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태풍이 올 거라고 하네요.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말복이고, 말복 이후부터는 더위가 사그라질 테니, 여름 기세가 한풀 꺾인 게 맞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름이 반환점 도는 귀한 장면을 포착합니다. 당신의 여름은 어땠나요. 

 

나에게 여름은 순례의 계절입니다. 순례를 하는 주체는 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내가 더위를 아무리 잘 견딘다 해도, 더위는 더위입니다. 엄청 더울 때는 나도 더위 때문에 지치게 됩니다. 몸은 무더위에 무기력해지는데, 마음은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닙니다. 온 곳으로 돌아다니며, 온 곳의 풍경을 살뜰히 살핍니다. 그간의 내 삶을 새로 탐방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지치지도 않고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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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성스럽지 않은 곳으로도 마음은 성큼성큼 걷습니다. 그리로 가서, 내가 원한 적 없는 기억들을 기념품으로 들고 오기도 합니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찍듯, 그 시절의 순간들을 나에게 새롭게 찍어 넣습니다. 마음이 그러는데 내 쪽에서 별 수 있나요. 대지가 지글지글 끓는 여름 오후나절, 작업하다 널브러져 있을 때마다, 나는 마음이 보여주는 풍경을 속수무책으로 감상합니다. 나의 여름은, 그 어떤 기억에도 무심해질 수 없는 계절입니다.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기억들이 전부 여름의 기억인 것도 아닌데요. 나는 여름마다 저절로, 저절로, 내 삶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름 한 철을 다 보내고 나면, 생애를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가을마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이 가벼워져서 자꾸 어딘가로 가고 싶나 봐요.

 

나에게 계절은 그냥 계절이 아닙니다. 희한하게 그러네요. 계절마다 으레 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그러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없는데요. 돌아오는 계절마다 꼬박꼬박 뭔가를 하며, 나는 내 생의 새로운 층을 이룹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일마다 뭘 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누군가는 부모님의 기일마다 본인의 유서를 쓰며 그동안의 삶을 정돈한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연말마다 뭘 하고, 누군가는 연초마다 뭘 하고, 누군가는 첫눈이 오는 날마다 뭘 하고. 

 

사실 여름에 무슨 힘이 있나요. 여름이 내 마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을 두루 돌아보며 마음 정리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다가, 새로운 여름을 만난 내가 그 생각을 꺼내 쓴 것뿐이겠죠. 새로운 계절은 나를 항상 자극하니까. 내 마음의 밑바닥을 한 번 뒤흔드니까. 가라앉아 있던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라서. 둥실 떠올라 있는 그것을 나는 발견할 수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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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봄에는 봄의 숙제를 하고, 여름에는 여름의 숙제를 하고, 가을에는 가을의 숙제를 하고, 겨울에는 겨울의 숙제를 합니다. 나는 계절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라서. 계절이 변하는 지점에서는 매번 일상의 관성 및 중력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서. 문득 새로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계절들은 나를 어김없이 멈춰 세웁니다.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잠시 멈추어 서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거나 고민할 수 있지만요. 한 번씩 살아가는 일에 그저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에게로 돌아오는 새로운 계절은 내 어깨를 붙들고 내 정강이에 힘을 싣습니다. 봄꽃과 여름볕, 가을 하늘과 겨울 바람은 나를 문득 멍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당장의 순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나는 내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됩니다. 시간의 물결 밖으로 나와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자각의 순간이 초여름이라면, 그때 내 마음은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를 떠난 내 마음은 내 인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리하거나 보충해야 할 것들을 꼼꼼하게 둘러봅니다. 

 

휴식에도 종류가 참 많죠. 멈추지 않은 채로도 휴식을 할 수 있고, 멈춘 채로도 휴식을 할 수 있고. 요즘 나는 멈추지 않은 채로 하는 휴식이 휴식 같지 않다고 자주 느낍니다. 잠시라도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지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내 오늘날의 휴식다운 휴식입니다.

 

계절이 갈라지는 길목에서만 빨간불을 발견하고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다리쉼이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장소를 정해 잠깐씩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삶. 나는 요즘 그런 삶 쪽으로 걷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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