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을 넘어서는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진보정치 청년 활동가 집담회

온라인뉴스 | 기사입력 2020/01/15 [21:49]

“‘공정’을 넘어서는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진보정치 청년 활동가 집담회

온라인뉴스 | 입력 : 2020/01/15 [21:49]

 

▲ 왼쪽부터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정나위 민주노총 조직쟁의부장, 윤지연 《워커스》 편집장, 강민진 정의당 대변인, 고근형 서울대학교 학생(사회변혁노동자당)  © 뉴스와 사람

조국이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난 지 보름.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조국 사태가 남긴 여파가 남아있다. 청년 세대는 특권층의 부정과 비리에 분노했고, 그들이 짜놓은 ‘스펙 잔치’에 박탈감을 느꼈다. 그렇게 조국 사태는 한국 사회에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 감사원은 서울교통공사 등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부당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정규직과 공시생들은 ‘공정성’의 잣대를 내밀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비난한다. 조국 사태로 광장이 갈라진 것처럼, ‘공정’에 대한 개념도 갈렸다. 《워커스》는 청년 진보정치 활동가들과 함께 조국 사태가 낳은 한국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 : 윤지연 《워커스》 편집장
 패널 : 강민진 정의당 대변인,
고근형 서울대학교 학생(사회변혁노동자당),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정나위 민주노총 조직쟁의부장
기록: 은혜진 기자
사진/정리: 김한주 기자

  © 뉴스와 사람

윤지연 우선 서울대, 고려대의 조국 규탄 집회가 ‘공정성’ 논란의 도화선이 됐다. 대학에서 시작된 이 집회를 각자 어떻게 바라봤나?

 

고근형 직접 목격한 바로는 나름 열기가 있었다. 서울대 학생 사이에서도 여론이 갈리지만, 조국 장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매번 2~300명은 참여했다. 서울대에서 처음 집회할 때는 학생들의 분노가 이해됐다. 학벌주의 문제가 있긴 했으나, 사회 정의를 바란다는 목소리에 기대한 바가 있었다. 조국 장관의 딸이 남과 다른 특혜를 본 건 사실이지 않나. 특히 ‘조국’이라는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니 더 분노했을 것이다. 분노의 배경에는 실재하는 여러 고민이 있다. 이제 서울대를 졸업해도 예전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문과는 고시와 로스쿨 준비로 몰리고, 이과는 공부가 매우 어렵고, 취업해도 숱한 구조조정에 내몰린다. 갈수록 기회는 적어지고 있는데, 누군가는 특혜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 참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문제는 학벌 사회의 최정점인 서울대와 고려대만이 이 분노를 표출했다는 점이다. 서울대, 고려대 말고 다른 대학에서는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서울대 집회 역시 ‘그동안 우리들은 상대적인 특혜를 안고 살지 않았나?’, ‘이 분노를 토대로 우리가 먼저 대안적인 교육 시스템을 말해야 하지 않았나?’라는 고민을 하지 못했다. 진영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다.

 

  © 뉴스와 사람

강민진 나는 서울대나 고려대에 다니지 않았던 청년으로서 한편으로 불의감도 느꼈다. 이곳 학생들의 촛불이 한국 사회 ‘청년의 목소리’로 대표됐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지방의 대학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면 이 집회는 ‘청년의 목소리’가 됐을까? 서울대 촛불의 경우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명문대라는 타이틀을 조국이 부정한 방식으로 훼손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반면 지방대나, 대학을 가지 못한 청년들은 타이틀이 없으니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나는 많은 청년이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에서 배제됐다고 봤다. 조국의 경우 위법이냐 아니냐를 떠나, 과거 사회주의자이자 평등을 말해왔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국민을 대표하기에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이 조국을 비판하기를 바랐던 부분도 있다.

 

윤지연 조국 사태로 불거진 ‘공정성’ 논란은 한국 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졌다고 보나.

정나위 조국 사태로 말미암은 ‘불공정’이라는 단어는 사실 불평등과 계급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조국과 조국의 딸이 있던 운동장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운동장이었으니까. 일례로 정규직 청년들은 같은 운동장에 있는 비정규직에게 경쟁이나 시험 같은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그런데 조국과 그 자녀에 의해 완전히 다른 운동장이 드러난 거다. 조국의 사모펀드, 재산, 딸의 논문 등은 우리가 모르던 ‘특권층의 운동장’이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이 신문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특권층도 우리 눈에 보일 일이 없었던 거다. 특히 특권층이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 그들의 운동장은 전면화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순을 느꼈을 거다.

 

강민진 서울대, 고대 학생들은 조국 논란을 통해 ‘불공정’이라는 자신들의 단어를 갖게 됐다. 자신은 시험 치고 들어와 고군분투하는데, 누군가는 다른 방식으로 입학해 졸업장을 얻는다는 거다. 반면 경쟁 사회에 들어가지도 못한 많은 청년은 이 논란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까? 불공정? 불평등? 이들은 자기 언어를 갖기 어렵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군의 친구가 “조국 논란은 대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19살 때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던 우리에게 다른 세상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입시 제도가 공정한가’, ‘고등학생의 논문 제1저자 등재는 가능한가’ 같은 논란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얘기다”라고 증언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말은 한국 사회가 가진 한계를 정확히 보여줬다. 한국 사회가 말하는 ‘공정’의 시각차는 매우 크다. 그리고 다수의 공정은 약자를 향하지 않았다.

 

“조국 사태로 말미암은 ‘불공정’ 이라는 단어는 사실 불평등과 계급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

 

윤지연 조국 사태로 양당을 중심으로 한 광장 집회가 열렸다. 그 속에서 진보진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진보진영은 조국 사태에서 어떤 목소리를 냈어야 했나.

▲ 정나위 민주노총 조직쟁의부장  © 뉴스와 사람

정나위 민주노총에서 서초동 집회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내부의 생각들은 다 다른 것 같은데, 그들과 호흡하지 못하면 여러 연대체 활동에서 협소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자발적인 광장투쟁이라는 이유로 꼭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 노동자들은 이미 서초동 촛불이 요구하는 사법개혁 투쟁을 오래전부터 진행해오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7월에 해고당한 1,500명의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현재 한국도로공사에 대법원 판결 이행을 요구하며, 문재인 정부에 책임을 물으며 투쟁하고 있다. 싸움의 양태가 다른 것이다. 톨게이트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해 정규직들은 ‘불공정하다’고 반발한다. 여기서도 ‘공정’의 문제가 나온다. 이와 관련해 한 톨게이트 노동자가 ‘시험 치고 들어온 당신들보다 우리의 삶이 더 치열했음을 인정하라’는 피켓을 썼다. 공정성 담론에 대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답이었다고 본다.

 

“경쟁에 내쳐진 청년은 ‘절차적 공정성’에 더 집착했다. 정부가 경쟁 체제를 그대로 두고서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건 무리가 따른다.”

 

신지예 민주노총이 서초동 촛불 집회에 참여하지 않아서 좋았다. 조국은 민정수석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노동자를 위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초동에서 노동자를 위한 구호를 들어본 적 있나? 노동자들은 그 곳에서 자신들의 구호를 외칠 수 있었을까? 서초동 촛불에서 약자와 평등은 호명되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서초동 촛불이 배척했고, 실제로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를 지우면서 집회가 진행됐다. 서초 촛불은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쳤다. 과연 사모펀드 같은 곳에 돈을 집어넣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연히 나는, 그리고 다수의 사람은 조국일 수 없다. 서초동 촛불은 ‘내가 성소수자다’(조국은 9월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동성애는 허용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지만,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비정규직이다’, ‘내가 사회적 약자다’ 같은 구호를 외쳤어야 했다. 이번 촛불은 총선을 향해 폭주하는 정치권이 시위대를 잡고 좋지 않은 방식으로 호도한 것이라 본다. 그들은 사법개혁에 대한 뚜렷한 안도 없었다. 서초동 촛불은 정치인들이 의무를 잃은 장소였다.

 

강민진 연장선상에서 촛불은 교육 문제를 얘기했어야 했다. 논란의 출발은 교육의 불공정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논란이 커지자 대학 입시 불공정 문제를 언급했다. 사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수능과 내신 절대평가 전환, 특목고·자사고 폐지 등의 교육개혁을 약속했다. 모두 지키지 않았거나 파기했다. 정부는 교육 문제를 바로잡지 못했다. 동시에 경쟁에 내쳐진 청년은 시험 같은 ‘절차적 공정성’에 더 집착했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 전환에 교대생, 임용고시생이 분노한 현상이 그렇다.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적은데 기간제 교사가 이 문에 들어서니 반발하는 거다. 애초의 잘못은 정부에 있다. 정부는 정규 교원을 마땅히 늘려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경쟁 체제를 그대로 두고서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건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약속을 어긴 정부의 잘못은 가려졌다.

 

윤지연 서초동 촛불은 3년 전 박근혜 퇴진 촛불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 뉴스와 사람

고근형 청년을 중심으로 얘기해본다면, 일단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광장이 갈라지지 않았나. 여기서 20대 청년은 두 곳 모두 가지 않았다.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에 따르면 10월 5일 서초동 집회에 참여한 20대는 8.5%) 청년들이 두 곳의 집회를 ‘내 삶을 바꾸는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2016년도 박근혜 퇴진 촛불과 차이가 있다. (영남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2016~2017 박근혜 퇴진 촛불에 참여한 20대는 19.3%) 박근혜 퇴진 촛불에는 내 삶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요구들이 있었다. 교육, 노동, 재벌, 인권 등 사회 변화 요구가 그것이다. 서초동, 광화문 촛불은 2016년 촛불처럼 모든 사람의 ‘삶의 문제’를 대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사회적 약자의 의제를 담는 광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최근 자취생 총궐기는 청년 주거 문제를 끄집어냈다. 이를 정부,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사실 이런 요구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청년 빈곤과 사회 양극화를 야기한 기득권, 재벌에게 책임을 묻는 방향이 필요하다.

 

신지예 2016년 촛불에서는 시민이 요구하는 ‘100대 개혁안’이 있었다. 노동과 복지, 교육 등 모든 사회 분야를 총망라해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투쟁의 끝은 ‘장미 대선’이었고 개혁은 실패했다. 우리는 대선이 끝이 아니라, 투쟁의 한 과정이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 촛불을 ‘혁명’이라고 말하려면, 새로운 체제, 공화국을 만들었어야 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이후 지금까지 투쟁의 과정으로 이어져 온 건 미투 운동을 비롯한 페미니즘 운동 정도다. 각기 다른 곳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이 사회 문제로 다시 터져 나와야 한다. 우리에겐 새로운 나라를 위한 새로운 광장이 필요하다.

 

“서초동, 광화문 촛불은 2016년 촛불처럼 모든 사람의 ‘삶의 문제’를 대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의 의제를 담는 광장이 필요하다.”

 

정나위 일단 2016년 촛불과 서초동 촛불은 자발적 투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의제 확장성과 흡수성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2016년 촛불에 민주노총이 참여하면서 많은 활동가가 놀랐던 것은 수많은 시민이 여러 의제를 흡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서초동 촛불의 의제 확장성은 미약했다. ‘내가 조국이다’라는 구호에서 그쳤고, ‘검찰 개혁’을 넘는 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 윤지연 ≪워커스≫ 편집장  © 뉴스와 사람

윤지연 하지만 박근혜 퇴진 촛불이 남긴 성과 역시 모두 민주당에 넘어갔다. 여전히 비정규직 일자리가 확산되고, 양극화는 해소되지 않았으며, 청년 실업은 올해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사회 개혁을 바란 2016년 촛불은 왜 실패했나?

 

정나위 박근혜 퇴진 촛불 때 1987년을 경험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계속 강조한 이야기는 ‘투쟁의 성과를 또 가진 자에게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만큼 위기감이 크지 않았을지 몰라도, 다들 촛불의 수렴점이 문재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다. 결국 제도 정치를 중심으로 대응이 이뤄졌고, 촛불의 성과가 제도권정치로 흡수됐다. 여러 사회단체가 모인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회의에서도, 박근혜 퇴진까지는 같이 갈 수 있으나 그 이후를 얘기하면 답이 없다는 전제가 컸다. 혁명의 단계까지 가지 못한 개혁의 성과는 모두 권력 안에서 이동한다는 역사를 실제로 느꼈다. 그 많은 경고를 듣고도 똑같은 실수를 한 거다.

 

신지예 나 역시 그게 패착이었다고 본다. 박근혜 촛불의 이후는 시민들에게 맡겨놨어야 했다. 이들이 시스템을 바꾸는 선택까지 이어졌어야 했다. 전 국민이 광장에 뛰쳐나갈 정도였으면, 국가 시스템 어딘가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박근혜 국정 농단은 정치, 경제 체제 문제를 모두 드러내지 않았나. 양당제로 이 시스템이 유지될 수 없다면, 촛불은 이 한계를 지적하고 국민 투표로 의원내각제든, 양원제든 정치 구조를 바꾸는 헌법 개정에 나섰어야 했다.

 

고근형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뒤 진보 정치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도 되짚어봐야 한다. 전교조는 정규직화 논란 때 기간제 교사를 등졌고,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참여 여부에만 매달리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판단을 지연시켰다. 정의당은 제1야당 지위를 자유한국당에 넘겼다. 그 사이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퇴진 촛불의 요구를 포기하고 진보하지 못했다. 한계가 분명한데도 진보정치는 대안을 세우지 못했고, 대안 세력을 만들지도 못했다. 2년의 세월을 허비했고, 한국 정치는 양당 체제로 복귀했다. 윤지연 문재인과 조국은 모두 ‘공정 사회’를 강조했던 인물이다. 문재인과 조국, 그리고 386세대로 이어지는 민주화 세대가 생각하는 ‘공정’은 현재 대중들이 갈망하는 ‘공정’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지예 386은 과거 한국 사회 변화의 주역이자. 현재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들은 20대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까지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이들은 국회에서 4선 의원이 되기도 하고, 네이버, 카카오, 게임 등 IT업계를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 스스로는 독재 정권에 맞섰고, 나라를 바꿨으니, 권력이 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거다.

 

한 번은 50대 중반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청년 정치에 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은 아직 권력을 얻지 못했다’, ‘아직까지 위에서 모든 걸 쥐락펴락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도 청년’이라더라. 청년 세대는 그 조차 갖기가 힘든데, 그래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건데, 그들은 이런 것을 이해하고 의식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나는 386에게 ‘당신은 20대 때 지금 청년 같은 삶을 살았느냐?’고 묻고 싶다. 지금 청년은 386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집단과 세대 간 불평등으로 혹사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사회의 전환은 꿈처럼 느껴지기에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먼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공정이 아닌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나위 완성차 노조 중 하나는 ‘조합원 연봉 1억 원 만들기’를 목표로 세운 적이 있다. 386세대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87년 민주노조 세대 역시 주변부 노동을 하는 청년 세대와 간극이 있다. 물론 집단화해서 평가할 수 없겠지만, 민주노조 1세대는 자기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다음 세대의 밥그릇을 챙겨놓지 못한 면이 있다. 이런 잘못이 계속되면, 다른 방식으로 들어온 동료 노동자를 향한 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분노 또한 지속될 것이다. 현재 모든 절차, 과정은 시험으로 얘기된다. 여기서 과정이 달랐다고 해서 그 사람은 차별받아야 하나? 임금을 덜 받아야 하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해 죽어야 하나? 라는 역질문도 필요하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든 룰을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먼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윤지연 현재 한국 사회의 불평등, 불공정의 문제는 무엇의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

 

강민진 나는 공정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공정성이라는 개념에 맞서 싸울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명박도 공정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삼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바른미래당까지 계속해서 공정을 언급한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은 연대를 확장하는 개념이 아니라, 내 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쓰였다. 앞으로 기득권은 공정을 더 강하게 말할 것이다. 진보정당과 운동진영은 이에 대항해 대안적인 목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고근형 조국 사태 이후 공정성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적을 향한 화살을 돌려야 한다. 약자나 소수자가 아니라, 지금의 자본주의 모순을 만든 재벌, 재벌과 손을 맞잡은 국가를 향해야 한다. 그리고 ‘공정’보다는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한다.

정나위 노동의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는 저임금, 장시간, 불평등 노동 체제를 만든 장본인이다.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확대하고,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한 개악이 대표적인 예다. 노조법을 개악하는 상황에서 더 평가할 여지가 없다. 불공정,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밑에 있는 층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상층이나 중간층이 아닌 최저 기준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민주노총의 과제다.

 

신지예 지금 체제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변화를 가져오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선거제 같은 시스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평등은 너무 당연한 의제고, 협력과 돌봄의 메시지를 던져야 할 때다. 한국에서는 서로를 돌본다는 분위기가 매우 취약하다. 젠더평등 등 제도권 정치에서 빠진 의제들도 너무 많다. 기후 위기는 지구의 시간이 8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협력, 돌봄, 지속 가능함을 얘기하지 않고, 조국만 논하며 필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가 만든 프레임을 넘어선 새로운 담론이 나와야 한다. [=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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